아토피가 알려준 임신 사실
지난 3월, 얼굴에 있던 아토피가 갑자기 심해졌다.
약도 똑같이 바르고 있고 생활 패턴이 달라진 것도 없는데 왜 이러지? 환절기라서 그런가? 안 그래도 봄만 되면 알레르기 때문에 재채기에 눈물 콧물 다 쏟아 내는 띤군이 꽃가루 때문 아니냐며 옆에서 거든다.
그렇게 일주일 즈음 지났을까. 아침에 일어나 아토피로 퉁퉁 붓고 아픈 얼굴을 보며 심히 심난해하던 그 순간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몸 밖의 변화가 아니라, 내 몸 안의 변화 때문에 아토피가 갑자기 심해진 게 아닐까? 대체 무슨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길래 지난 몇 년간 잠잠하던 아토피가 이렇게 난리인거지? ………..설마…임신???
아토피가 심해진 이유를 임신에서 찾게 된 사정은 이러하다. 아토피는 딱히 치료약이 없다. 그저 염증을 억제하는 스테로이드나 면역 억제제로 대증(對症) 치료만 가능할 뿐. 아토피가 나으려면 면역체계나 체질 같은 몸의 근본적인 것이 변해야 한다는데, 그게 어디 쉬이 일어나는 일인가. 그런 와중에 오로지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단기적인 체질 변화를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임신이다. 임신으로 몸이 전체적으로 바뀌면서 아토피도 덩달아 좋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때 아토피로 고생이 심할 적엔 ‘이 참에 아이나 가져봐?’하며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임신이 되고 나서 아토피가 꼭 좋아지란 보장은 없고, 오히려 임신 때문에 더 안 좋아지거나 아예 없던 사람한테 아토피가 갑자기 생기기도 한단다. 그러니까 복불복인 것이다.
어쨌든, 아토피가 임신에 반응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그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이야. 아니 그것보다도, 내가 임신을 하게 될 줄이야…!
지금도 신기한 건, 그날 어쩌다 그렇게 불현듯 ‘임신’이 떠올랐을까 하는 것이다. 혹시 내 존재를 알아달라는 뽀동이(훗날의 태명)의 바람(혹은 절규가) 내게 전해졌던 건 아닐까. (엄마, 나 뱃속에 있는데 그걸 모르고 그렇게 음주를 해대면 우짭니까, 날 좀 보소~!!)
임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친 그날, 마침 집에 임신 테스트기가 하나 있었다. 방금 전에 볼 일을 봤지만 방광이 다시 찰 때까지 기다릴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혹시나 하고 쥐어짜보니 소변 몇 방울이 간신히 테스트기에 떨어졌다. 양이 워낙 적어서 테스트가 제대로 될까 싶은 찰나, 그 몇 방울이 쭉쭉 뻗어 나가더니 결과창에 순식간에 두 줄이 똭! 찍히는 것이 아닌가! ………당첨이구나!!!!
자고 있던 띤군을 깨웠다.
“나 방금 임신 테스트했는데, 양성 나왔어!!!”
근데 어째 너무나 차분한 띤군. 에이, 설마.. 하는 눈치다. 그동안 ‘불발탄’을 좀 날렸던 탓도 있고, 연애에 결혼기간까지 합쳐서 도합 9년인데, 그 긴 시간 동안 너무나 별 일(?) 없이 지냈기 때문인 것도 있을 테다. 그것도 그렇지만, 테스트할 때 소변 양이 엄청 적었는데 테스트가 제대로 된 거긴 한 걸까? 이거 아무래도 한 번은 못 미덥고, 두 번은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띤군이 그 길로 옷을 갈아입고 약국으로 향했다. 총알처럼 다녀온 그가 흥분한 얼굴로 하는 말이, 약사曰, 테스트의 정확도가 99%란다.
‘너 몰랐구나. 그래서 아까 그렇게 차분했던 거니?’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난 두 번째 테스터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이미 물을 잔뜩 마셔서 그런지 흐릿하게 나오긴 했지만 두 번째 테스트도 분명 두줄이다. 두 번 다 두줄이니, 아무래도 빼박인 것 같다.
테스트에서 양성으로 나와도 임신이 정상적으로 잘 됐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산부인과에서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한다. 때마침 미루고 미루던 자궁경부암 검사를 한다고 딱 한 달 전부터 다니기 시작한 동네 산부인과가 있었다. 이게 시기가 꽤 절묘했던 것이, 덕분에 초음파 예약과 함께 임신 상담을 바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원래 다니던 병원이 아닌 새 병원에 예약을 잡는 일이 만만치 않다. 나 같은 경우, 예약을 하려고 전화를 하면 앞으로 2개월은 예약이 꽉 찼다, 새 환자는 더 못 받는다 등의 답변이 돌아와서 좌절감을 맛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기 검진 같은 게 아니고 진짜 아파서 연락을 해도 환자 받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어서, 독일 살이 초반에는 서러움에 눈물을 머금은 적도 더러 있다. 독일에서는 병원 예약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혹자는 독일에서 의료보험 가입이 필수인데다, 보험이 있으면 진료비와 웬만한 치료비가 모두 무료인지라 사람들이 병원을 불필요할 정도로 자주 찾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한국에서처럼 반차를 내고 병원에 갈 필요도 없으니 일적으로도 병원을 찾는 게 부담이 덜 될 수밖에. [관련 포스팅: 달라도 너무 다른 독일의 직장문화] 하여튼, 의료 수준은 세계 제일이라는 의료 선진국 독일에서 막상 진료를 받기는 쉽지 않은 이 아이러니한 현실!
다시 임신 이야기로 돌아와서, 산부인과에 전화해서 테스트 결과에 대해 말하니 지금 임신 5주 정도 되었을 테니 2주 뒤에 오라며 예약을 잡아줬다. 2주 뒤에나요? 좀 더 일찍 가면 안되나요? 하고 물으니, 그 전에는 초음파를 해도 확인이 안 된다나. 빨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데 2주를 어찌 기다리나…!

네가 내 마지막 알코올이 될 줄이야…
임신도 처음인데, 독일에서 임신은 또 처음이라
독일은 ‘계획’과 ‘예약’의 나라다. 독일에서 유학했던 유시민 작가가 어느 티비 프로그램에서 ‘독일에서는 농담도 미리 서면 통보를 하고 해야 할 정도’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던 것처럼, 계획 없이는 불편할 일이 참 많은 나라다. 빠른 일 처리와 최강의 고객 서비스를 자랑하는 나라에서 온 나는 (그게 꼭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지만) 이러한 독일에 와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독일에서는 헬스장이든 인터넷이든 어디 조합이든간에 가입 해지 통보를 적어도 2~3개월 전에 해야한다. 가입은 보통 1년 단위로 하고, 1년이 다 가기 2~3개월 전에 미리 이메일이나 편지로 해지 통지를 보내야하는 것이다. 근데 가입해놓은 곳 마다 가입 일자가 다르니 1년이 끝나는 기준일도 다를 수밖에 없고, 그러니 그걸 하나하나 기억하고 2, 3개월을 계산해서 제때에 가입 해지 통지를 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캘린더에 하나하나 적어 놓고 알람 설정을 해놓지 않고서는 잊고 지나치기 딱 좋은 것이다. 그리고 이걸 바꿔 말하면, 집 인터넷을 바꾸든 헬스장을 다른데 끊든 최소한 2, 3개월 전에는 계획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 뿐이랴, 병원도 무조건 예약제 (진짜진짜 긴급한 거 아니고서는 예약 없이 가면 퇴짜 맞거나 혼납니다. 응급실은 제외. ‘응급실’이니까), 관공서 방문도 왠만한 건 다 예약제, 회사를 관두는 건 무려 3~6개월 전에 ‘예약’ 해야하고, 휴가 계획은 1년치를 미리 내야 하며, 심지어 유치원은 자녀가 태어날 때부터 예약을 해놔야 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소문까지 있다. 사적인 모임도 ‘예약제’인건 마찬가지로, 아무리 작은 모임도 일주일 정도는 미리 시간 약속을 잡아 놓는 것이 예의다.
이런 독일에서 살다 보니 난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미리 처리(계획)해야할 것, 예약이 필요한 것부터 찾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뇌리에 떠오른 건 산파産婆, 혹은 조산사助産師라고 불리는 헤바메Hebamme를 찾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근처 오픈바흐Offenbach에 살 때 한 임신한 친구로부터 헤바메에 대한 아찔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바로, 독일에서는 헤바메의 동반 없이는 출산을 하러 와도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진통은 오고, 애는 나오려는데 헤바메가 없다고 병원에서 받아주질 않는다니! 독일에서는 출산을 할 때 산부인과 의사 말고도 헤바메들이 큰 역할을 수행한다. 얼핏 듣기로는 출산이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경우, 의사의 개입 없이 조산사가 거의 전적으로 출산을 주도한다고. 한데, 이렇게 중요한 분들이 요즘 독일 고용시장에서 매우 귀해졌다는 게 문제다. 한국처럼 출산율이 계속 낮아지는 독일이지만, 헤마메라는 직업의 인기는 그것보다도 더 가파르게 내려가는 추세인가 보다. 헤바메는 어디 정부기관에서 찾아주거나 하지 않고 임신부가 개인적으로 직접 찾아야 한다. 물론 헤바메 한 분이 커버할 수 있는 임산부 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칫 여유부리며 미루다가는 헤바메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될 수 있다고.
이러한 연유로 난 임신 5주차,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헤바메를 찾아 나섰다.
<헤바메 검색 사이트> 1. https://hebammensuche.de/ 2. GKV Spitzenverband: https://www.gkv-spitzenverband.de/service/hebammenliste/hebammenliste.jsp 온라인 검색 외에도 자신이 다니는 산부인과나 가까운 출산병원Geburtsklinik에 문의해도 된다. 보통은 임신 14주 이전에 헤바메를 찾는 것을 추천한다고.
위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내가 사는 곳의 우편번호를 치면 그 지역 헤바메들의 프로필이 쭉 뜬다, 경력은 얼마나 되는지, 다른 언어도 가능한지, 침술이나 산전후 마사지, 요가 같은 자격증도 있는지 볼 수 있다. 나는 헤바메 몇 분과 통화도 하고 직접 만나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강압적인 말투에 인내심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만 같은 무서운 헤바메도 있었고, 보통은 헤바메가 산모 집으로 찾아오지만 반대로 나보고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하는 분도 있었다. 몇 번의 연락을 돌린 끝에 나는 상냥하면서도 믿음이 가는 지금의 헤바메 Birgit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Birgit은 한 달에 한 번씩 우리 집에 찾아와 내 몸 상태를 체크하고, 이 걱정 많은 초보 엄마의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다른 엄마들한테서 심심찮게 듣는, 차갑고 상투적인 헤바메가 아니라 항상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는 그녀를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외국에서 첫 아이를 갖게 되어 고군분투하는 나와 띤군에게 그녀는 그야말로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저나, 위의 프랑크푸르트 친구한테서 들었다던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적어도 하이델베르크에는 적용이 안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 출산 병원Geburtsklinik에는 병원 소속 헤바메들이 상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바메 찾기 다음으로 실행에 들어간 건 출산 병원 예약이었다. 다른 블로그를 보니 출산 병원에도 미리 등록을 해야 한단다. 혹여나 늦게 하면 등록이 어려울까 싶어 나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5주 차에 바로 출산 병원에 연락을 했는데, 전화를 받은 병원 직원 曰, ‘일러도 너~무 이르네요, 34주 지나서나 다시 연락하세요~’ 한다. 하! 내가 준비성이 좋아도 너무 좋았군! 독일식으로 한다는 것이 가끔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오바할 때가 있다. 학습 효과가 쬐까 과했다고 해야할까. (사실 그만큼 학습 과정에 시행착오가 많고 힘들었다는 얘기임)
임신도 처음이라 신세계지만, 연고도 없고 언어도 문화도 다른 타지에서 임신을 해 나름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던 지난 9개월. 그래도 여기까지 잘 왔다! 앞으로 있을 출산과 양육의 신세계도 부디 순항할 수 있길..!
<출산 병원 등록하기> ..는 훗날 Birgit에게 물으니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한다. (적어도 하이델베르크에서는) 하지만 원하는 병원에 미리 등록 절차를 밟아놓으면 출산이 닥쳐서 정신이 없을 때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는 있다. 그리고 꼭 등록한 병원에서 출산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다른 병원에 가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씀. 등록 전 출산이나 병원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면 병원 소속 헤바메와 상담 약속Hebammensprechstunde을 잡으면 된다.
처음으로 가진 아이를 독일에서 낳다니… 정말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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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전날 마신 와인 기억해 ㅋㅋㅋㅋ 좋은 헤바베분 만나서 넘 다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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