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임신은 아니겠지?’
로드트립 5일 차. 일주일 간 지속된 울렁거림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는데 geewhy 의 전화가 왔다. “너 혹시 임신 아냐? 한번 테스트 해봐. 너 증상이 좀 의심스러워.” 설마, 설마… 여름 원피스가 안맞는 이유는 단지 살이 쪘을 거라고, 속이 안 좋은 이유도 최근에 먹은 바베큐 요리에 속이 뒤집어 졌다고만 생각했다. 그날 밤 벨라지오 분수 쇼를 보고 들어오는 길에 CVS 약국에 들려서 반신반의하며 임테기를 사왔다. 그러고 다음 날 아침, 애매하게 흐릿한 두 줄을 보았다. 얼떨떨했다. 나는 상황파악을 할 여를도 없이 다음 목적지인 아리조나 주로 가기 위해서 짐을 싸야한다.
나의 첫 임테기. 라스베가스에서 알게 된 소식. 안녕 라스베가스! Trump 호텔을 지나치며.
“임산부는 장애인이 아니야”
출산 경험이 있는 동생에게 먼저 메세지를 했다. 그리고 온 답변. “와 축하해…. 근데 석사 공부는 어떡해… 슬퍼하지 말고 기쁜일이라고 생각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찾아온거야. 초반에 유산 될 확률도 높으니까 몸 관리 잘 해.” 다들 초기에 유산 될 확률이 높으니 무조건 휴식을 취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게 공통적인 답변이었다. 모두가 병원부터 가보라고 조언했다. ‘지금 상태로 그랜드 캐년을 가도 되나?’ 달리는 차 안에서 걱정이 되서 남편에게 얘기를 꺼냈더니 의외의 망언을 한다. “임산부는 장애인이 아니야. 경이로운 자연을 코 앞에 두고 그냥 지나치겠다는 거야?” 이후 얘기는 생략했지만 그 말은 꽤 충격적이었다. 이건 과연 문화차이인가. 한국에서 얘기하는 조언들이 과민반응이라며 나에게 강해져야 한다고 타이른다.
사실은 나도 너무나 가고 싶었던 그랜드캐년이라 지나칠 수 없었다. 이 날은 약 다섯 시간을 달려 네바다 주에서 후버댐을 보고 저녁 늦게 아리조나 주 Flagstaff 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예정대로 다음 날 아침 그랜드캐년으로 출발한다.
미국 대공항 시기에 건축된 후버 댐 (Hoover Dam). 벌써부터 웅장함과 스케일이 느껴진다.
그랜드캐년 하이킹, 사우스림 (South Rim)
그랜드캐년은 크게 노스림(North Rim), 사우스림(South Rim), 웨스트림 (West Rim) 으로 나누어져있는데 당일치기 하이킹 경우 사우스림의 Bright Angel Trail 과 South Kaibab Trail 이 대표적이다. 브라이트 엔젤 트레일이 조금 더 수월하다는 평이 있어서 우리는 조금 더 난이도가 있는 사우스 카이밥 트레일로 정했다. 남편은 한쪽 어깨에 물과 샌드위치, 과일, 그리고 얼음이 든 가방을 메고 준비를 마쳤다. 이 날도 여전히 속은 울렁거렸고 차에서는 멀미를 잊으려고 잠을 청했다.
그랜드캐년 입구. 오른쪽 어깨에 멘 파란가방 안에는 쥬스와 물을 시원하게 유지해 줄 얼음이 가득 들어있다. 우리를 본 사람들은 몇 인분 식량이냐며 대단하다고 엄지척을 내보였다. 나는 뒤에서 총총 따라가느라 바쁨.
그랜드캐년 하이킹은 지금껏 내가 겪어 본 하이킹과는 달랐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나중에 왔던 길을 다시 올라와야 한다. 혹은 Rim to Rim 으로 다른 트레일로 가는 경우 아래에서 캠핑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체력이 좋을 때 열심히 풍경도 보며 내려오는 건 좋았지만 점점 반대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꽤 심상치 않았다. 더운 날씨에 하이킹의 마무리가 하산이 아닌 등산이라니.
OOH AAH 포인트. Skeleton point 를 지나 돗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가졌다.
그랜드캐년 아래서 먹는 시원한 수박. 날이 더우니 수분 보충하기.
점심을 먹고나니 노곤노곤 해지면서 잠이 왔다. 임신 초기에 소화가 잘 안되어서 음식을 먹으면 자주 피곤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다들 그랜드캐년에서 ‘인생샷’을 남기고 오던데, 나는 죄다 누워있는 사진들 뿐이다.
그래도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느리지만 무사히 트레일을 완주했다. 올라올 땐 약간의 비가 내려서 오히려 시원했다. 평소 체력이었다면 더 열심히 걸었을 텐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아쉬울 뿐. 남편은 어제부터 내 컨디션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기까지 왔는데 반나절 하이킹은 너무 아쉽다며 풀코스로 하자고 나를 설득했다. 첫번 째 트레일을 다녀오고 아직 해가 떠있다며 브라이트 앤젤 트레일을 가보자며 나를 떠본다. 나는 답변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차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굳이 하이킹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캐년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위에서 보는 경치도 너무나 멋졌다. 라스베가스에서 당일치기로 오는 여행객 중에는 캐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렇게 입구에서 잠깐 내려서 사진만 찍기도 한단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안 게 다행이다. 몸은 무겁고 눈은 감겼지만… 돌아오는 길이 뿌듯했다. 언제 다시 가보려나! 오늘은 푹 쉬고 내일은 최장거리, 열 네시간을 달려야 한다.
등산 후 먹는 신라면. 얼큰한 국물이 꿀맛이었다!
대단해 우미야… 널 항상 응원한다. 두마리/세마리 토기 다 잡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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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랜드 캐년 버스 투어를 해서 하루 종일 버스만 탔던 기억이 ㅎㅎㅎ 힘들었을테지만, 분명 나중에 좋은 추억으로 남을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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