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와인 새롭게 보기: 품종부터 산지, 등급, 역사까지

독일의 포도밭이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이유

강 연안을 가파르게 휘감는 언덕 위에 포도나무가 빼곡하다. 이탈리아 키안티Chianti 풍의 부드러운 언덕과 잔잔한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포도밭과는 사뭇 다른,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한 포도밭이다. 강둑에서 올려다보면 아찔할 정도로 경사가 가파른 저런 곳을 사람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농사를 지을 걸 생각하니 내가 다 겁이 난다. 잘못하다가 발이라도 헛디디는 날엔 그대로 강둑까지 굴러 떨어지고 말텐데….

독일의 유명 와인산지 모젤Mosel 지역의 가파른 언덕 위에 빽빽히 들어선 포도밭
독일의 유명 와인 산지, 모젤 지역 (Mosel)
credit: mosel-zweinull.de

독일의 유명한 와인 산지 모젤Mosel, 라인강Rhein의 풍경이다. 독일에서는 왜 하필 저런 곳에 포도밭을 일궜을까? 설마 경작할 땅이 부족했던 걸까?

알고 보니 그 이유는 햇빛, 바로 햇빛에 있었다.

쌀쌀하고 흐린 날이 많은 독일에서는 햇빛이 참 귀하다. 유럽을 넘어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던 로마 제국이 춥고 비만 주룩주룩 오는 날씨 때문에 라인강 동쪽으로는(지금의 독일령) 더 진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독일의 날씨는 악명 높다. 여기서 몇 년을 살고 나니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 필자도 해가 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춥고 일조량이 적은 독일에서는 해를 조금이라도 더 받게 하기 위해 가파른 언덕 위에 포도밭을 일군다. 남향 혹은 남서향을 향해 강을 굽어보며 가파르게 기울어진 언덕, 이런 곳이 포도밭의 일조량을 늘리기에 최상 아니 최선의 조건일 것이다. 필자가 와인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는 소믈리에 언니에게 물으니, 이렇게 비탈진 곳은 물도 잘 빠지기 때문에 독일 같이 추운 지방에서 와인 농사를 짓기에 더 유리하단다. 맞다, 포도나무는 습한 땅을 싫어한다 했다.

그나저나, 저렇게 경사가 심한 곳에서는 기계 작업도 어려울 테니 사람이 손수 밭을 가꾸고 핸드피킹(손수확)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믈리에 언니가 덧붙이기를, 그런 작업량을 감안하면 독일 와인은 (프랑스에 비해) 정말 저렴한 거라고!

기후가 낳은 독일의 대표 와인 품종

쌀쌀하고 일조량이 적은 독일에서는 적포도보다는 청포도가, 당도 높고 파워풀한 포도 품종보다는 풍부한 산도에 가벼운 바디의 품종이 잘 자란다. 그래서 독일 와인은 레드 와인보다는 화이트 와인을 더 알아준다.

독일 와인의 대표 품종은 단연 리즐링Riesling이다. 높은 산도와 상큼하고 가벼운 맛이 특징인 리즐링은 다른 화이트 와인 품종 보다도 단 맛이 적고 풋풋한 햇사과와 갓 베어낸 풀향 같은 것이 느껴진다. 여름날 시원하게 쿨링 한 리즐링 한 모금은 더위에 축 쳐져있던 몸과 마음을 부르르 흔들어 깨운다. 생굴 같이 해산물을 날 것으로 먹을 때도 잘 어울리는 와인이다.

독일에서 가장 많이 나는 레드 품종은 프랑스에서 피노누아Pinot Noir라고 불리는 슈펫버건더Spätburgunder다. 슈펫버건더의 ‘버건더’는 피노누아의 프랑스 원산지인 브루고뉴Bourgogne를 독일식으로 부른 버건드Burgund에서 따왔다. 이 녀석 역시 다른 레드 품종에 비해 산도가 높고 섬세한 맛과 적은 탄닌이 특징이다. 우아하면서도 새침한 젊은 아가씨가 떠오르는 슈펫버건더는 필자가 가장 즐겨 마시는 레드와인 품종이기도 하다.

독일에 온다면 화이트 와인은 리즐링을, 레드 와인은 슈펫버건더 품종을 꼭 맛볼 것을 추천한다. 특히 독일산 슈펫버건더는 프랑스 부르고뉴산 피노누아보다 훨씬 저렴해서 가성비 좋은 피노누아를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포도가 달수록 좋은 와인이 된다!?

독일의 포도는 기후 때문에라도 원체 당도가 낮은 편이지만 한때는 무리하게 늘린 재배량과 기술 부족으로 당도가 턱없이 낮은, 심지어는 제대로 익지도 않은 포도로 와인을 만들곤 했다고 한다. 높은 산도는 물을 타서 희석시키고 당이 부족해 힘을 못 쓰는 알코올 발효는 설탕을 넣어 인위적으로 부추기곤 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독일은 아예 포도의 당도로 와인을 평가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바로 1971년에 도입된 독일의 와인 등급제다.

이 등급제에 따르면 수확한 포도의 당도가 높을수록 와인의 품질도 올라간다. 흡사 패션쇼에서 완성된 옷은 제쳐 두고 옷의 원료만 보는 격이다. 예상할 수 있듯이 품질 평가가 당도에 방점이 찍혀있는 만큼 높은 등급의 와인들은 대부분 단 맛을 한껏 살린 스위트 와인들이다.

저때야 농사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이런 등급제를 그러려니 했겠지만 최근까지도 독일에서 이 등급제를 사용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포도가 달다고 다 좋은 와인이 되는 것이 아니며, 같은 포도라 해도 어떻게 양조하느냐에 따라 맛도 품질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말이다.

작년인 2020년 새로운 와인 법규가 들어서기 전까지 이러한 부족함을 메우고 있었던 건 독일의 VDP 시스템이었다.

VDP (Verband Deutscher Prädikatsweingüter)는 독일의 와인 생산자들이 모여 만든 생산자 조합으로, 1971년 등급제와는 전혀 다른 자체적인 와인 등급 시스템을 운영한다. VDP에 등록된 와인은 병마개 부분에 찍힌 특유의 독수리 문양으로 알아볼 수 있다.

VDP가 와인에서 주의 깊게 보는 것은 지역적 특색이다. 토양과 기후, 식물군 등이 다르면 만들어지는 와인도 다르다는 기조 아래 그러한 지역적 특색을 잘 반영한 와인일수록 좋은 와인이라고 평가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토양을 예로 들어보겠다. 점판암이 섞인 토양은 햇빛의 열을 잘 보존해서 추운 기후에서도 양질의 포도를 수확할 수 있게 돕는데, 독일 모젤 지역의 토양이 그러하다. 모래가 많은 토양은 물이 잘 빠지고 열은 보존하여 따뜻한 기후에서는 색도 탄닌도 산도도 옅은 부드러운 와인이, 추운 기후에서는 아로마가 풍성한 와인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잡초를 제거하느냐 안 하느냐도 포도 과실에 큰 차이를 만드는데, 바로 그런 점을 이용하여 방부제인 아황산염을 줄인, 말 그대로 더 내추럴한 ‘내추럴 와인’이 만들어진다. (유기농 와인의 진실, 와인 방부제와 내추럴 와인)

독일의 와인 등급 시스템인 VDP의 상징 독수리 문양과 모토
“Herkunft ist Alles (유래가 모든 것을 말한다)”, VDP 소개 페이지의 첫 문구다. VDP의 모토를 잘 보여준다.

어렴풋한 이해만으로 VDP 와인을 사다 마시던 필자도 이번 기회에 VDP 와인들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알아보았다. VDP의 회원이 되는 조건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1.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재배한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다.
2. 로컬 품종을 재배한다. 각 지방과 재배지에 적합한 로컬 품종이 수확량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모젤과 나어Nahe 지방에서는 오직 리즐링만 재배 가능하고, 라인가우와 라인헤슨Rheinhessen 지방에서는 리즐링과 슈펫버건더만 생산할 수 있다.
3. 소규모로 재배한다. 헥타르당 생산량이 정해져 있어 수확물의 양보다는 질에 초점을 맞춘다.
4. 포도밭과 양조장은 정기적으로 감사를 받고 등급의 적합성을 재심 받는다.

VDP 와인은 다른 독일 와인에 비해서는 조금 비싼 편이지만 한국의 와인 가격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필자가 즐겨 마시는 VDP 와인은 모두 10유로 안팎으로, VDP 등급 중 가장 아래 등급인 Gutswein 소속이다. 그보다 두 단계 높은 등급인 Erste Lage의 와인도 15유로 정도면 구할 수 있다. 옆 나라 프랑스의 와인 보다도 독일 와인이 가성비가 훨씬 좋은 편이라, 독일에 있는 동안은 독일 와인을 기분 좋게 사 마시고 있다.

독일 와인 등급제 VDP의 등급 체계를 보여준다.
VDP 와인 등급. 위로 올라갈수록 높은 등급이다. Grosse Lage라는 명칭은 프랑스의 Grand Cru를 연상시킨다.
VDP Erste Lage의 리즐링 와인이다. 이 와인은 출신 지방을 넘어서서 아예 포도 나무가 심어진 밭 구릉의 이름까지 표기하고 있다. 독일 팔츠 지방의 Dürkheimer Spielberg이라는 포도밭에서 난 와인으로, Rewe에서 15유로에 살 수 있다.

새 와인 법이 소비자에게 의미하는 것은?

2020년 독일에 새 와인 법이 들어섰다. 이제는 포도의 당도가 아닌 VDP와 같은 테루아(Terroir)를 바탕으로 와인을 평가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일찍부터 사용해 온 와인 등급제다.

등급제는 바뀌었지만 소비자에게 당장 달라지는 건 없다. 이미 시장에 나와있는 와인들과 숙성을 오래하는 상품을 고려해서 병 라벨의 표기법은 2026년부터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원래 방식대로 와인을 고르면 된다.

2026년부터는 병 라벨 표기가 VDP식 혹은 프랑스식으로 바뀌어, 산지 표시가 작은 지역 단위로 돼있을수록 높은 등급의 와인, 그러니까 그 밭과 지역의 특색을 잘 살린 와인이다. 이렇게 되면 소비자 입장에서도 와인의 산지를 기준으로 자기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기가 수월해질 거라는 기대다. 하지만 원산지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지 않고서야 어느 지역Ort이 어느 지방Region 소속인지, 어느 것이 더 작은 산지 단위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프랑스 와인을 고를 때마다 겪는 당혹감이 이제는 독일 와인을 고를 때도 재현되려나보다.

새 와인 등급 체계, 위로 올라갈수록 높은 등급이고 가장 윗 등급의 경우 또다시 4등급으로 나뉜다.

와인 없인 못 살아, 로마인의 정복과 와인의 전파

독일에 와인이 전해진 것은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영토(지금의 독일)까지 진출하면서부터이다. 게르만족의 알코올음료인 맥주보다 자기네 와인을 선호했던 로마인들은 점령지에 성곽을 쌓고 도시를 세우는 동시에 와인도 양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독일의 와인 산지들이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로마 시대 유적이 가득한 트리어Trier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고 그곳에 흐르는 모젤강 연안에는 와인 양조를 위한 포도밭이 형성된다. 그렇게 모젤 와인이 시작됐다.

지도에서 독일의 와인 산지를 들여다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와인 산지가 독일의 남서쪽, 모젤강과 라인강 인근에 모여있다는 점이다. 재미있게도 로마 제국의 영토 확장도 딱 라인강과 모젤강 인근을 경계로 끝이 난다. (최대 영토 확장기 AD117 기준) 말 그대로 로마인이 머물렀던 곳에 와인이 들어왔고, 지금까지도 그곳을 중심으로 독일의 와인 산업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와인 산지는 대부분 남서부 모젤강과 라인강 인근이다. (출처: Lidl.de)
로마 제국 영토의 최대 확장기인 AD117 지도 일부. 라틴어로 Rhenus라고 표시된 라인강과 그 위 Augusta Treverorum이라는 당시 이름으로 표시된 트리어, 그 위로 흐르는 모젤강이 로마 영토의 끝자락에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참고:
Introduction to Soil Types and Wine, WineFolly
Classification of German wine
What is the VDP?, Decanter
Deutsches Weininstitut
German Wine / Ancient Rome / History of Trier, Wikipedia
Jetzt erkennen Sie am Etikett, wie gut ein deutscher Wein ist, welt.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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