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치, 그렇지!] 눈치 보는 그대에게, 느려도 괜찮아!

‘빨리!’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참 많이 등장하는 말이다. 세계 최강의 인터넷 속도가 대변하듯, 한국인의 일처리 속도는 단연 LTE, 아니 5G급이다. 바로바로 줄어드는 계산대 줄이나, 테이블 사이를 날아다니며 서빙하는 아주머니나, 관공서에 예약같은거 없이 찾아가도 왠만한 서류는 바로 뗄 수 있는 한국의 신속함과 편리함은, 외국 나와 살다보면 절절히 느껴진다.

그렇다. 이나라 저나라를 겪어봐도 한국만큼 일처리가 빠른 나라가 없다! 일처리 속도만큼은 ‘토종 한국인’이라 자칭하는 글쓴이 본인도 할 일은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고, 반대로 누가 해야할 일 앞에서 밍기적 거리는거는 쬐-까 보기 힘들어하는 성격이다.

그대(계산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묘하게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그곳, 바로 계산대다. 100미터 달리기라도 준비하듯, 내 차례가 오기 전까지 나는 장바구니, 지갑, 계산할 돈까지 미리 꺼내 들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 내 차례가 되면 입으로는 여유롭게 ‘할로~’ 하면서 손은 누가 뒤에서 쫓아오기라도 하듯, 서둘러 물건을 장바구니에 던져 넣는다. 급한일이 있느냐? 아니다. 그럼 뒷사람이 눈치라도 주는거냐? 그것도 아니다. 나를 푸쉬하는 이 심리적 압박의 원천이 어딘고 하니, 뒷사람한테 폐 안 끼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계산이 느리면 뒷사람이 오래 기다려야 할테니까. 비슷한 예로, 운전할 때 뒤에 차가 있는데 내가 쭉쭉 안 밟으면 나도 모르게 쪼들리는 마음과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독일사람들은 계산대에서 절대 내맘 같지 않다. 만년 느긋한 그들은 계산원도 손님도 자기 차례가 오면 뒤에 아무리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도 서두름 No, No, 질문할거 다~하고, 할거 다~한다. 이런 이 나라 사람들을 1년, 2년 계속해서 보다 보니 어느 순간, 뒷사람에게 폐가될 수도 있다는 가당찮은 걱정으로 계산대 앞에서마저 평정을 잃는 (참 평정 잃을것도 많지..) 내가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남의 눈치를 보는가? 자기 속도대로 차근차근 하는게 폐끼칠 일인가?

누어 랑삼! (NUR LANGSAM)

아래는 독일에서 흔히 겪는 상황이다.

a. 마트나 상점 서비스카운터에 뭐 좀 물어보려고 갔는데 직원이 나를 보고도 자기 하던 일만 계속 한다. 불러도 오지않는다. (약간 무시당한 기분에 언짢을 수 있음) 직원은 자기 할 일을 다 끝내고 나서야 나한테 온다.

b. 손님이 직원을 기다린다. 동료와 수다를 떨면서 다른일을 하던 직원은 손님을 보고도 여유롭게 하던 일과 수다를 마저 하고 손님에게 온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 아닌가? 그럼 독일사람들의 반응은? ‘나 여기있어’ 한 번 사인을 보내고나서는 상대방이 올때까지 기다린다. 묵묵히. 아, 기다림의 고수들!

‘매너있게’ 안 기다리고 직원을 재촉하면 어떻게 될까? 아래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c. 우체국에서 앞 사람이 떠나자 내 차례다 싶어 들어갔다. 그랬더니 오라고 안했는데 왔다고 우체국 직원이 큰소리로 꾸짖는다. 손님은 어쩔수 없이 기다리던 자리로 돌아가서 직원이 부를때까지 기다린다.

독일 노동자(?)들의 카리스마가 느껴지시는가?

빵집에서 줄도 없이 자기차례를 묵묵히 기다리는 독일사람들.
가끔 줄도 없이 기다려야할 때가 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 왠만해서는 다들 누가 자기보다 먼저왔는지 알고있고, 새치기도 하지 않는다. (들어가는 순간 기다리는 사람들 스캐닝 필수!) 새치기를 당한것 같으면 예의바르지만 당당하게 ‘제가 먼저왔습니다!’하면 대부분 쿨하게 인정한다.

누어 랑삼, 천천히 해! 라는 독일말이다. ‘재촉하는 사람 없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해’ 하는 매너 제스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여기서는 재촉 당하는 사람도, 재촉을 하는 사람도 못봤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빨리 처리해달라고, 빨리해서 넘겨달라며 ‘빨리’를 남발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중대한 차이가 또 있으니, 직원과 손님이 동등하다는 인식이다. ‘손님은 왕이다’ 같은 표현처럼 갑을관계를 당연시하는 시각에 잠식되지 않은 건강한 생산자-소비자관계, 단체 안에서의 개인의 책임과 역할보다 개인의 독립성이 존중받는 사회적 공감대의 존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덜 눈치 보고, 남들(손님, 고용주 등)의 요구에 과도하게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직원유니폼 속에서도 내 욕구에 귀기울이며 ‘나’일 수 있는 것! 그러니 행동 또한 훨씬 자연스러울 수밖에. (나처럼 계산대앞에서까지 쫄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서두르다가 실수하는것 보다 조금 느려도 제대로 하는게 낫지 않은가?

독일 동네마다 있는 '길거리 오픈책장' 앞에서도 묵묵히 자기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생긴다.
묵묵한 기다림이 어디서나 자연스러운 독일.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길거리 오픈책장’ 앞에서 나도 ‘독일식’으로 내 차례를 기다리는 중.

오랜만에 한국분들을 만나면 그들의 빠른 무브먼트에 새삼 놀라곤 한다. 딱히 서두를 일이 없는것 같은데도 그런다. 독일사람들과 비교하면 딱 ‘2배속 재생’ 같달까. 문제는 빨리 움직이는데 아무리 익숙해져도 몸과 마음은 빠른 움직임만큼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하고, 그러니 당연히 스트레스도 커진다. 이걸 ‘부지런함’이라고 긍정할 수도 있겠다. 한국경제의 고속성장을 이끈 부지런함 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성과를 빨리 만들어내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 과정보다는 결과와 보여지는게 더 중요한 편향된 가치척도 또한 자리하고 있다.

내 머리에도 항시 눌려져있는 이 ‘눈치버튼’을 어떻게하면 좋을까? 영구적 스위치오프는 긴 수련이 필요할터. 하지만 순간순간에 스위치를 잠시 끄는건 가능하다. 이건 긴 수련 없이 약간의 연습만 하면 할 수 있다. 조급한 나를 발견할 때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내 마음을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쪼들릴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면 그 근본 없는 불안은 과감하게 떨쳐 버린다! 그렇게하면 내 생각과 몸이 그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지는걸 느낀다. 불필요한 긴장이 풀려서일 거다. 내 몸과 마음 자각하기와 질문하기를 반복하다보면 언젠가는 훨씬 더 내강內强한 나를 만날 수 있을거라 기대한다.

4 Comments

  1. MarieMarie H

    ‘천천히해!’ㅋㅋㅋㅋ 되게 낯설다.ㅋㅋㅋㅋㅋ 직원과 손님이 동등한 인식은 정말 좋은 문화같아. 한국처럼 갑을관계, ‘손님이 왕이다’ 같은 마인드는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기 너무 힘들게 하는 듯 ㅜㅜ 우체국에서 겪은 에피소드 나도 겪었어.ㅋㅋㅋㅋㅋ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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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LARA A.

    차파리타❤️ 글 읽으면서 나도 반성했다는ㅋㅋㅋ 나도 무언가 계획하면 빨리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는거 같아. 영주권 신청할때도 생각했던 것보다 서류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깐 스트레스 받고 ㅋㅋㅋ 그런데 일본에 있을때 든 생각인데, 내가 이렇게 하면 “이 시간안에 받을 수 있다 혹은 내 차례가 온다” 라는 신뢰가 있으면 덜 조급해지는거 같더라구. 독일 사람들이 이렇게 천천히 해도 된다는 어떤 의미에서 서로간의 ‘신뢰’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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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eewhy

    누어 랑삼! 좋은 단어다! 앞으로 그 단어 나도 사용해야지. ㅎㅎ 좋은 글 공유 감사합니다. 빨리빨리 문화가 한국의 압축성장의 동원이 됐지만 지속적으로 적용될 순 없는것 같아.

    미국에서는 사람들 재촉하기가 어려워. ㅠ 사람들 재촉하면 자기 인권 침해라고 생각하면서 고소할 수도 있어 ㅋㅋㅋ. 미국은 오히려 카운터에 서있는 사람이 갑이란걸 느끼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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