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치, 그렇지!] 독일어의 숫자 거꾸로 읽기

익숙한 사고흐름의 역행, 독일어의 숫자읽기

독일어를 배우다보면 (독일사람들한텐 좀 미안하지만) ‘왜 이렇게 쓸데없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명사 성별이 2개도 아닌 3개씩이나 되는 것도 그렇고, 명사의 역할이 직접목적어akkusativ이냐 간접목적어dativ이냐, 또는 소유격genetiv이냐에 따라 주구장창 모양이 바뀌는 관사도 그렇고… 이 복잡 난해한 독일어 문법들을 공부하다가 머리에 쥐 날뻔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독일어의 복잡한 관사, 형용사 변형 체계를 문법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관사만 바뀌냐, 형용사도 주구장~창 바뀐다. 문법책에서 변형룰을 설명하고 있다. 😈

독일어에는 골때리는 영역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숫자읽기’되시겠다.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독일어에서는 숫자를 뒤에서부터 읽는다. 이게 무슨 소린고 하니, 28은 ‘8과20 (achtundzwanzig)’, 43은 ‘3과40(dreiundvierzig)이라고 읽는거다. 그나마 다행인건 모든 숫자를 거꾸로 읽는건 아니라는 점! 10의자리 숫자, 정확히는 21부터 99까지만 그렇게 읽는다. 하지만 독일어를 공부하는 사람의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숫자가 커지면 읽는게 한층 더! 복잡해진다. 영어에서 그렇듯 독일어에서도 만萬단위 없이 천千단위로 끊어 읽는데 (43,000을 43 thousand 이라고 읽듯), 이때 십의자리가된 숫자는 모두 거꾸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 예를들어 숫자 43,124에서는 ’43’과 ’24’은 거꾸로 읽어야 한다. 저 숫자를 독일어식으로 말하면 ‘3 and 40 thousand 1 hundred 4 and 20 (dreiundvierzig tausend ein hundert vierundzwanzig)’가 된다. 느낌이 오시는가? 사고의 흐름을 역행하는 이 이상한 읽기법 때문에 독일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숫자영역에서 조차 얼마나 애를 먹을지!

독일에서의 생활은 10의자리 숫자 천지

여기서는 물건을 사든 밥을 먹든 10의자리로 돈쓸일이 많은데다가, 유로는 소수점 2자리까지 가격이 매겨져있을때가 대부분이라 (29.49유로 처럼), 계산할때마다 머릿속은 자기자리를 찾는 숫자들로 뒤엉킨다. ‘29.49유로에요’라는 점원의 말을 듣는 순간 몇초간 정지, 들은 숫자를 머릿속으로 되짚은 후 되묻는다, ‘9와 40 맞죠?(neunundvierzig)?’

길고양이曰: 그렇다고 독일어 안 배울거냐?, 나: 여기서 살려면 어쩔수 없지..’

계산할때 뿐이냐, 날짜나 시간을 말할때(병원엘 가든 시청에서 서류를 떼든 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독일에선 특히나 많이 듣고 말하게되는 것), 전화번호나 카드번호를 받아적을 때도 렉걸린 컴퓨터마냥 멈칫멈칫, 들은 숫자를 맞게 처리하느라 나도 모르게 긴장한다. 4년을 살았어도 여전히 적응 안되는 독일의 숫자읽기다.

외국인만 힘든건 또 아니랍니다

머릿속으로는 7과80을 생각하면서 쓸땐 87를 써야하는 이 요상한 표현체계를 독일인들도 헷갈려하긴 마찬가지다. 특히 정상적(?)으로 왼쪽부터 읽는 외국어가 끼어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지니, 독일인들도 자주 실수를 하곤 한다. 영어로 대화할 때 독일인들이 말한 숫자를 잘 들어보라, 거꾸로 말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헷갈리는건 컴퓨터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글을 읽듯 컴퓨터도 입력값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읽어 내려가는데, 독일어로 숫자를 생각하며 타이핑을 하면 거꾸로 타이핑하기 십상이다. 생각하는거 따로 누르는거 따로이니 회계실수가 빈번하단다. 이미 쓸만큼 써 익숙해진 어른들도 그런데 이제 막 배우는 아이들은 오죽할까? 가엾은 독일 아이들은 이 거꾸로 읽기법 때문에 산수 학습에 꽤나 애를 먹는다고.

유독 독일어만 그런건가?

이렇게 ‘쓸데없는’ 읽기법이 어쩌다 생긴건지 궁금하지 않을수가 없다. 그래서 찾아보니, 어머나, 그보다 먼저 재미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독일어만 그런게 아니란다!

놀랍게도 영어도 16세기 전까진 독일어처럼 숫자를 거꾸로 읽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twenty-four이 아닌 four-and-twenty라고 읽었던거다! 노르웨이는 더 최근에서야(1951년) 10의자리를 1의자리 앞에 읽기로 법을 고쳤다. 그러고보니 11-19사이의 숫자는 영어에서 아직까지도 거꾸로 읽고 있다. (thir-teen, four-teen, fif-teen을 보시라, ‘3-10’, ‘4-10’, ‘5-10’이 생각나지 않는가?) 아예 ‘명사화’되어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독일어만 지금까지도 거꾸로 읽기법을 고집하는 이유는?

고집한다기 보다는 단순히 고칠 기회를 못찾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독일이 (그리고 독일어를 쓰는 이웃국가들이) 지금 읽기체계를 개정하면 원래 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오히려, 적어도 몇세대 동안은, 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개정의 필요성은 계속 논의되지만 실천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독일 입장에선 일찍이 이 골칫거리를 해치워버린(?) 영국과 노르웨이가 쬐금 부러울만도 하겠다.

16세기 영국이 거꾸로 읽기법 개정을 이뤄낼 때, 독일은 처참했던 30년 전쟁을 겪고 350여개의 나라로 조각조각 나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계속돼, 독일이 영국처럼 일찍이 전면적인 개정을 할 수 없었던 이유로 꼽히곤 한다. (출처: 먼나라 이웃나라 도이칠란트편, 이원복 저)

이 거꾸로 읽는 ‘로직’은 어디서 왔나?

아담 리스의 주판계산 데모 (출처: Youtube)

아무래도 산수계산을 할 때의 로직의 흐름 (1의자리->10의자리)이 읽는방법에까지 반영된게 아닌가 한다. 존경받는 독일의 수학자 아담 리스Adam Ries가 16세기 독일에 널리 전파한 주판산수법이 이러한 읽기체계를 형성한 원인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의 산수법을 보면 로마주판을 본뜬 주판 위에 동전을 두고 1의 자리부터 5를 지나 10의 자리, 50을 지나 100의 자리 순으로 계산해 올라가는 식이다. 1의 자리에서 10의 자리로 가는 계산순서 때문에 숫자를 읽는 순서까지도 1의 자리->10의 자리가 되었을 수 있다는 추론이다. (사실 요즘 우리가 배우는 산수도 1의자리에서 10자리 순서로 계산하는건 마찬가지다)

요리조리 뜯어보고 나니 전혀 말이 안되는거 같지는 않은 독일어의 숫자 읽기법! 하지만 우리 뇌는 계산을 할 때와 숫자를 읽을때 각기 다른 ‘모드’로 돌아가고, 우리에게 익숙한 사고흐름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적응하기 참~ 어려울 수밖에 없는게 독일어의 숫자 거꾸로 읽기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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